고요한 아침의 시작
삼십 년을 넘게 살아온 이 도시의 아침은 여전히 분주하다. 출근길의 자동차 소음과 신호등에 걸린 사람들의 얼굴에서 서두름과 피로가 엿보인다. 김상호, 올해로 쉰둘이 된 그는 이 모든 풍경 속에 녹아들어 있다. 일찍이 머리카락은 희끗해졌고, 눈가에는 세월이 남긴 주름이 깊게 새겨졌지만,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오늘도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상호는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알람이 울리기 전부터 깨어 있는 일이 많아졌다. 그는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부엌으로 향했다. 커피포트를 올려놓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상호는 창문 밖을 내다봤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거리에는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상호는 이런 시간이 좋았다. 가족들이 아직 잠들어 있는 이른 아침,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오늘도 상호는 평소와 다름없이 작은 사무실로 출근할 준비를 했다. 그는 20년 넘게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다. 인쇄업체에서 기획 업무를 맡고 있는 그는 회사의 오랜 일꾼이다. 회사는 크지 않지만, 그에게는 제법 소중한 공간이었다. 수많은 기획서를 쓰고, 계약을 따내고, 때론 거래처와의 어려운 협상을 이겨내며 보낸 세월이었다. 이젠 큰 변화도, 기대도 없지만 그가 쌓아온 시간은 무시할 수 없었다.
집을 나서기 전, 아내가 아침 식사를 차려주었다. 따뜻한 국과 함께 구운 생선, 그리고 김치. 별다른 특별함은 없지만, 상호는 이 아침 식사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아내는 그가 회사에 나가는 길에 항상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오늘도 힘내요.” 상호는 그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서로에게서 주고받는 작은 말들이 하루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된다.
사무실에 도착한 상호는 책상 위에 놓인 어지러운 서류들 사이에서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나씩 떠올렸다. 사장과의 미팅, 신규 프로젝트 기획서 제출, 그리고 자잘한 업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커피 한 잔을 내려놓고 컴퓨터를 켰다.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이메일들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상호는 묵묵히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이제는 익숙한 일의 연속이지만, 그는 여전히 이 과정에서 자부심을 느꼈다. 누군가는 당연히 여길 그 작은 성과들이, 그에게는 하루를 살아가는 이유였다.
점심시간, 상호는 회사 근처의 작은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예전엔 동료들과 함께 했던 식사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혼자가 더 익숙해졌다. 메뉴는 늘 비슷하다.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같은 소박한 음식들. 식사를 하며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가족 생각이 떠오른다. 오늘 저녁은 어떤 음식을 먹을까,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그는 가족을 떠올리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하루가 끝나고 퇴근길에 오른 상호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도착하면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서 공부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고, 아내는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상호는 조용히 씻고 나와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는다. 특별할 것 없는 저녁 시간,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하루를 확인하는 순간이 그에게는 가장 소중하다.
상호는 침대에 눕기 전, 내일의 일정을 잠시 떠올렸다.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작은 위안들이 그를 지탱해 준다. 오늘도 그렇게, 고요한 하루가 지나간다. 내일은 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상호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