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자리
평범한 월요일 아침이었다. 김상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오늘따라 부쩍 서늘해진 공기가 느껴졌다. 상호는 서둘러 부엌으로 가서 커피포트를 켜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침 해가 뜨기 전의 어둑한 하늘이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가족들이 아직 잠들어 있는 이 시간이 상호에게는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순간이었다. 이 고요한 시간을 즐기는 것도 잠시, 상호는 오늘따라 묵직한 감정이 밀려왔다.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상호는 커피잔을 들고 거실로 가서 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몇 달 전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홀로 상호를 키워내며 가족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상호는 늘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말없이 짊어졌던 무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 오늘은 좀 힘드네요.” 상호는 작게 중얼거리며 사진을 어루만졌다. 아버지는 늘 조용한 사람이었다. 상호가 어릴 적, 아버지는 잔소리도 하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뒷바라지하며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다. 상호는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그 침묵 속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상호 자신이 이제 아버지의 나이에 가까워지면서, 그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려는 찰나, 상호의 아들이 다가와 말했다. “아빠, 오늘 학교 끝나고 축구 연습해요. 끝나고 늦게 들어갈 것 같아요.” 중학생이 된 아들은 요즘 부쩍 축구에 열중하고 있었다. 상호는 아들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나도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했었지.’ 어린 시절, 상호는 학원이나 친구와의 약속을 위해 아버지에게 수많은 허락을 구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늘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에서 용돈을 꺼내주셨다. 그 순간들이 새삼 그리웠다.
“그래, 늦지 않게 조심히 와라.” 상호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들은 가볍게 웃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상호는 문득 자신이 아버지에게 했던 수많은 대답들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묵묵히 지켜봐 주던 그 따뜻한 눈길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것만 같았다.
회사에 도착한 상호는 또다시 쌓여 있는 업무 속으로 파묻혔다. 오늘은 새로운 프로젝트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며 상호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버지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아침의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업무에 집중하려 애썼다. 지금은 상호가 가족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시간이었다.
프레젠테이션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상호는 팀원들과의 긴 토론을 거치며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긴장이 풀리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상호는 잠시 회의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빌딩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바깥은 퇴근을 서두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풍경 속에서 상호는 문득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의 하늘을 떠올렸다. 차가운 겨울 하늘 아래에서 무심하게 흩날리던 눈송이들. 그때의 아픔이 다시금 가슴을 저리게 했다.
“상호 씨, 괜찮아요?” 팀 동료가 상호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물었다. 상호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조금 멍했네요.” 동료는 그런 상호의 얼굴을 한동안 지켜보더니, 말없이 그의 옆에 앉아 주었다. 상호는 동료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항상 강해 보여야 했던 그는 이렇게 잠깐이나마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있는 시간이 소중했다.
퇴근 후, 상호는 집으로 가기 전에 아버지의 묘소에 잠시 들렀다. 퇴근길에 들르는 건 처음이었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묘 앞에 선 상호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서 있었다. 차갑게 불어오는 가을 바람이 상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묵묵히 아버지와 눈을 맞췄다. “아버지, 저도 이제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상호는 작게 속삭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막걸리 한 병을 꺼내어 묘 앞에 따랐다. 아버지는 생전에 막걸리를 좋아하셨다. 아버지와 함께 막걸리를 나누던 날들이 떠오르며, 상호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죄송해요. 더 잘해드렸어야 했는데.” 상호는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말없이 아들을 바라보는 그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상호는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식탁의 풍경이었지만, 오늘따라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아내의 따뜻한 말투,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평화로운 공기. 상호는 그 모든 것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아버지가 그토록 지켜주고 싶어 했던 가족의 모습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이.
잠자리에 들기 전, 상호는 아이들이 자는 모습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상호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 순간, 아버지로서의 자리와 책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상호는 눈을 감으며 오늘의 하루를 가슴에 새겼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자신도 묵묵히 가족을 지켜주는 든든한 존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오늘도 상호는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자리에서, 이제는 자신이 가족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고, 새로운 내일이 찾아올 것이다.